광주동씨

廣州董氏

1439년(세종21) 지단천군사가 왕명에 따라 새로 작성한 동안미의 호적을 후록하여 호조에 보고한 문서로 광주동씨 족보에 수록된 내용. 원문서는 전하지 않고 『廣州董氏大同譜』 ( 1986 )에 轉載되어 있는 戶口牒呈이다. 正統4년(1439; 세종21) 12월에 知端川郡事 洪 이 戶曹 에 올린 첩정으로 董安美 의 戶口내용을 後錄하였다. 지단천군사 가 이와 같은 호구첩정을 올린 것은 바로 전해인 戊午年 11월 초1일에 도착한 都觀察黜陟使 의 關文에 따른 것이다. 도관찰출척사 의 지시는 다시 보름 전인 10월 15일에 내려온 漢城府 관문에 의거한 것이다. 한성부 에서는 올린 啓目에 대해 세종 이 大小員人의 戶籍을 다음 해인 己未年(1439) 가을부터 만들라는 敎旨를 내린 것이 그 내용이다. 이 교지 건은 同副承旨 鄭忠敬 이 담당하였다. 이와 같은 명령에 따라 지단천군사 는 前 上護軍 동안미 의 호적을 작성하고자 舊本을 가지고 나오게 하여 이를 相考하여 戶口를 작성하였다. 호구의 내용은 첩정에 후록되었다. 동안미 호구에는 戶首인 동안미 와 그 처 이씨 , 그리고 그 사이에 태어난 2남2녀의 자녀가 등재되었다. 그 외 동안미 의 형제자매 3인이 부기되었다. 생존한 다른 가족원의 경우에는 연령이 함께 기록되었는데 반해, 이 3남매에게는 나이가 보이지 않는다. 호수와 그 처의 四祖와 母를 推尋하여 기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간단히 그 이름과 관직만을 기록한 것인지, 아니면 후대에 족보에 수록하는 과정에서 기록을 축소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. 조선후기 호적에서 노비가 아닌 여성이 자신의 이름으로 기록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. 그에 반해 동안미 의 一女와 二女는 각각 末應豆 , 赤非 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다. 동안미 의 長妹의 경우는 혼인하였기 때문인지 처 李氏 와 마찬가지로 董氏 라고만 기록되었다. 반면 28세의 일녀가 이름으로 기록된 점도 흥미롭다."

광주동씨의 시조

동중서

동중서의 인생 개요

동중서(은)는 기원전 0176년 중국에서 태어났다. 그는 동중서의 부인(와)과 적어도 한 명의 아들을 두었다. 그는 기원전 0104년 그의 고향에서 7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.

경기도

경기도

가족 연대표

-10

0

10

20

동중서의 부인
기원전0173년–사망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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